복음서에 기록된 갈릴리의 지리적 배경 | |||||||||||||||||||||||||||||||||||||||||||||||||||
관리자 | 2014-08-18 10:43:58 | ||||||||||||||||||||||||||||||||||||||||||||||||||
< 복음서에 기록된 갈릴리의 지리적인 배경> 비옥한 초승달 지역 (Fertile Crescent)의 남서쪽 끝에 위치한 팔레스틴은 서쪽 지중해 바다와 동쪽 아라비아 사막의 중간에 있다. 이 글은 복음서의 주요 배경이 되는 갈릴리 지역에 한정한다. 문자적으로 ‘갈릴리’는 원형 또는 변방이란 뜻의 ‘갈릴 (Galil)’에서 비롯되었다. 구약 성경에 갈릴리는 ‘이방’이란 말이 더해져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다 (사 9:1).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라 부른 이유는 갈릴리 지역이 다른 나라와 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잦은 왕래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팔레스틴은 해안 평야, 중앙 산지, 요단 계곡과 트랜스 요르단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갈릴리 지역은 이런 지리적인 구분에서 차이가 있다. 갈릴리의 북쪽 해안 평야는 폭이 좁고, 산지에 의해 남북으로 고립되었다. 남쪽은 갈멜산에 의해 그리고 북쪽은 로쉬하니크라 (Rosh haNiqra)에 의해 외부와 차단되었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에는 동서 방향으로 평야가 발달되었는데, 이런 모습은 사마리아나 유다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갈릴리는 서쪽으로 페니키아의 가나안 해양 문화와 가까운 반면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접해 있어 역사적으로 주변 여러 나라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갈릴리의 사방 경계를 정하면 다음과 같다. 갈릴리의 서쪽은 아셀 해안 평야, 동쪽은 훌라 분지, 갈릴리 호수, 그리고 요단강이 그 경계를 이룬다. 남쪽은 이스르엘 평야와 벧산 평야가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아묵 골짜기 (Amuq valley)의 리타니 강 (Litani river)이 경계를 이룬다. [이 사진은 갈릴리 호수의 형성을 보여준다. 골란 고원의 용암이 흘러 훌라 분지와 요단 계곡을 차단하여 갈릴리 호수가 생겨났다] 역사적으로 갈릴리는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요세푸스는 베르사베 (Bersabe/Horvat Beersheba)를 중심으로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로 구분하였다. 미쉬나는 크파르 하나냐 (Kefar Hananiah)를 경계로 삼았다. 하나냐의 북쪽으로는 상수리 나무가 자라지 않는 지역으로 상부 갈릴리는 이곳의 북쪽으로 아묵 골짜기까지를 가리킨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베르사베와 하나냐는 서로 인접한 마을로써 벧하케렘 골짜기에 있다. 그러므로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의 경계는 벧하케렘 골짜기로 구분된다. 1. 상부 갈릴리 미쉬나는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를 상수리 나무 (sycamore)가 자라는 여부에 따라 구분하였지만 그 외에도 이 두 지역을 구분하는 요인들은 많다. 상부 갈릴리는 하부 갈릴리에 비하여 아주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부 갈릴리의 산지는 평균 550m 정도인데 북쪽 산지는 대부분 600-1200m에 이르는 높은 산으로 이루어졌다. 남쪽은 산들이 동서로 발달되었지만, 북쪽은 남동-북서 방향으로 발달되었고, 깊은 협곡, 분지, 산지, 고립된 산마루 등으로 이루어져 지역간의 교통이 단절되었다. 바위는 단단한 석회암이 대부분이며 석회암이 풍화작용에 의하여 매우 제한된 지역에 충적토를 이루기도 한다. 많은 강수량으로 인하여 숲은 우거졌지만 우기철의 많은 비로 피해가 해마다 발생하는 지역이다. 비록 많은 양의 비가 내리지만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댐이나 구덩이 (cisterns)에 물을 저수해야 했다. 2. 하부 갈릴리 지각 변동 (tectonic pressure)의 의하여 형성된 하부 갈릴리는 동서로 이어진 작은 산맥들이 남북으로 발달되었으며, 산지와 산지 사이는 평야로 이루어졌다. 이곳의 바위는 석회암이며 평야는 충적토이다. 산지를 북쪽에서부터 열거하면 샤고르 (Shagor), 요드파트 (Yodpat), 투란 (Turan), 나사렛 (Nazareth) 산지이다. Nazareth 산지 남쪽으로 지각 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또 하나의 산인 모레 (Moreh)가 있다. 하부 갈릴리의 평야들은 북쪽에서부터 벧하케렘 (Beth haKerem), 사흐닌 (Sahknin), 벧네토파 (Beth Netopah), 투란 (Turan/Rimon) 평야가 있다. 투란 평야의 남쪽에 이스르엘 평야가 있다.
이외에 갈릴리를 남북으로 연결했던 또 다른 도로들은 므깃도- 벧산- 텔 오바댜 (202-233), 또는 므깃도- 시므론- 한나돈- 힛틴 고원으로써 이 도로는 나사렛을 서쪽에서 북쪽으로 우회한 도로이다. 므깃도-힛틴 고원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비가 내리는 우기철에 물이 서쪽 시므론으로 흐르기 때문에 동쪽 도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지형적인 상황만을 고려하면 오히려 시므론 근처 나사렛 산지의 북쪽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길은 한나돈을 지나 벧네토파의 넓은 평야를 편안하게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므론은 초기 가나안 시대와 중기 가나안 시대의 중요 도성이었다.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공관복음서에 잘 기록되었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네 제자와 함께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갈릴리 사역은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라고 기록되었다. 두 번째 갈릴리 전도는 <예수께서 각 성과 각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으로 기록되었다. 일반적으로 두 번째 전도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것으로 이해한다. 세 번째 전도은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고 기록되었다.
도시나 성읍이 제한적이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역은 모두 하부 갈릴리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부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 지역이다. 비록 하부 갈릴리 지역이 벧산과 악고와 같은 헬라 도시들과 인접했다 할지라도 이곳의 유대인 분포는 이방인들에 비하여 절대 다수에 있었고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에 그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하부 갈릴리에 위치한 헬라화된 유대인 도시는 세포리스와 디베랴가 있다. 이곳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에릭 마이어스 (Eric M. Meyers)에 따르면 1세기 당시 세포리스의 인구는 약 18,000명 (60헥타르/ 600두남), 그리고 디베랴의 인구는 24,000명 (80헥타르/ 800두남)으로 추산한다. 세포리스와 디베랴 다음으로 중간 도시들은 막달라 (Tarichaeae)와 가바 (Gaba)로써 크기는 20헥타르 (200두남)에 이르며 인구는 약 3,000명 정도 추정된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에는 약 200개 정도의 유대인 마을들이 있었고 각 마을의 인구는 500명 정도였다. 그러므로 마이어스에 따르면, 갈릴리의 전체 인구는 대략 150,000-175,000으로 추정된다. 호너 (Hoehner)는 갈릴리의 대략 인구를 약 200,000명으로 계산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갈릴리의 인구 분포는 도시 중심이 아니라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최근 조나단 리드 (Jonathan Reed)는 지금까지의 발굴에 근거하여 가버나움의 인구를 약 1,700명 정도로 추정하였다. 5. 마무리 예수님은 자신의 공적인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주변 이방 국가들과 인접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메시아로서 사역하신 예수님은 이미 갈릴리에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셨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말씀하셨으니 주로 유대인 마을들이 밀집된 하부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셨다. 비록 헬라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어도 고유 정체성을 지켜온 많은 유대인들이 하부 갈릴리에 살고 있었고, 각 마을들에는 회당이 있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이방 도시를 방문하신 목적 역시 잃어버린 하나님의 양을 찾기 위함이셨다. 성경의 사실적 배경을 알면 성경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