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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사형의 고고학적인 유일한 증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3-20 13:43:32
십자가 사형의 고고학적인 유일한 증거
 
십자가 사형은 신약성경과 성경 외의 여러 역사적인 문헌들을 통해 확인된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 사형을 로마인들에 의해 시작된 사형제도로 이해하지만, 십자가 사형은 사실 주전 1천년 전, 앗수르, 페니키아, 페르시아에 의해 사용된 징벌과 사형제도였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유입된 십자가 사형은 그리스 본토에서는 거의사용되지 않았지만, 시실리와 이태리남부에서 자주사용되었다. 헬라시대에 십자가 사형이 자주 집행되었는데, 주전 323년 알렉산더의 사망 이후 십자가 사형은 셀류키드왕조와 톨레미왕조의 국가적 사형제도로 채택되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였다. 신명기 21:22-23절에 의하면,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달린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형제도는 돌을 던져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스모니안 시대에 유대인들에 의해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적도 있었다. 알렉산더얀네우스(주전103-76년)는 주전 88년, 하루에 800명의 바리새인들을 십자가 처형하기도 했다.

(사진은 요하난 벤하그콜의 석관)
 
주전 1세기 말,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제국의 공식 사형제도로 채택하였다. 십자가 사형은 로마인이 아닌 노예에 제한되었다. 십자가에 해당하다고 판결된 노예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처형장까지 지고갔다. 이것은 죄의책임을 묻고 많은 이들로부터 모욕을 주기 위함이었다. 십자가 제도는 초기에는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노예를 꼭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징벌적 의미가 컸지만, 주전 1세기에 점차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형제도로 자리 잡았다.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노예에게 징벌제도로 사용된 십자가 제도는 후에는 전쟁포로자들, 반역자, 도망자들을 처형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전쟁 중에 반란자들이나 도망자들이 대거처형되기도 했다. 주전 71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때에 로마인들은 카푸스(Capus)에서 로마(Rome)에 이르는 도로변에 6천명을 십자가 처형하여 즐비하게 세워두기도 했다. 헤롯 1세가 죽고 주 후 7년, 유대 땅에서 작은 소요가 발생하였다. 당시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구레뇨는 예루살렘에서 2천명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다. 주후 70년 로마장군 디도는 하루에 500명까지 수 개월동안 유대인들을 십자가 처형하기도 했다. 
 
십자가 사형 틀에 못을 박아 죽음에 이르게 할 경우 사형수는 나무 틀 위에 눕혀졌다. 그리고 그의 어깨는 십자가 위쪽에 고정시켰고, 그의 양쪽 발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몸무게를 지탱해줄 받침대는 일반적으로 없었다. 그러면 나무 틀에 달린 사형수는 두 세시간 내에 심한 근육 경련과 질식으로 사망에 이른다. 십자가에 달리면 사형수는 우선 숨을 쉬기 어렵다. 그래서 사형수는 자신의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 그는 약 30-60초간 지탱 할 수 있지만, 이후에는 기운이 빠지고, 질식과 근육경련의 반복으로 결국은 탈진, 혼미한 정신, 온몸의 고통과 함께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고통은 몇 시간 계속된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팔레스틴에서 유대인들을 처형 할 때에 한가지 배려를 하였다. 다리를 꺾으므로 사형수가 십자가에서 속히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은 사형수들이 십자가에 달린 채 고통을 느끼며 죽음에 이르도록 했지만, 그러나 죽은 자를 당일에 장사지내야하는 유대인의 문화를 고려하여 속히 죽음에 이르도록 다리를 꺾도록 하였다. 그러면 밤이 되기 전에 장사 지낼 수 있었다(요19:31-33).
 
1968년 무더운 여름이다. 예루살렘 옛 성(Old City of Jerusalem)에서 북쪽 멀지않은 유대인 마을인 기브앗하미브타르(Giv’at HaMivtar)에서 1세기 당시의 무덤과 가치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무덤은 주 후 1세기의 전형적인 유대인 가족무덤(Kokhim tomb)으로, 무덤에서 몇 개의 석관(Ossuary)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석관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은사람의 뼈가 못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는 십자가 사형에 대한 고고학적인 유일한 증거이다.


(사진은 요하난 벤하그콜의 발꿈치에 박힌 쇠못)
 
예수님은 유대 종교인들의 시기와 모함에 의해 로마 총독인 본디로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셨다. 이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과 당시 역사적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 사형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기브앗하미브타르에서 발견 된 유물이 유일하다. 
 
석관(Ossuary)에는 죽은 자의 이름이 ‘요하난 벤하그콜(Yohanan Ben Hagkol)’로 기록되었다. 요하난은 24-28세의 젊은 남자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십자가 처형의 죄목은 알 수 없지만 요하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에 이른 것은 확실하다. 석관에서 나온 요하난의 오른발 뒤꿈치 뼈에 큰 쇠못이 박힌 것이 그 유력한 증거이다. 
 
요하난 벤하그콜은 1세기 팔레스틴에서 살았던 평범한 유대인이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무덤과 석관에서 발견된 증거로 보아, 요하난은 십자가에 달린 채 숨이 끊어졌으며 그의 가족에 의해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따라 가족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요하난의 시신을 장사지내는데 문제가 있었다. 요하난의 뼈에 단단히 박힌 쇠 못을 빼내는 것이 문제였다. 올리브나무로 만든 십자가 사형틀과 사형수의 뼈에 깊이박힌, 구부려 놓은 쇠 못을 빼려다 잘못하면 요하난의 뼈를 으스러지게 할 수 있어 가족은 하는 수 없이 십자가 사형틀의 나무 일부와 쇠 못이 뼈에 박힌 채 그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따라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지 1년이 되는 날, 가족은 그의 무덤을 찾아 요하난의 오른발 뒤꿈치에 쇠 못이 박힌 채, 뼈를 석관에 담았다. 그리고 요하난의 석관은 2천년이 지난 1968년 여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 된 것이다. 
 
 
(사진은 요하난 벤하그콜의 십자가 사형에 대한 예상 그림)
 
필자는 요하난 벤하그콜의 무덤을 찾기 위해 꼬박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무덤을 찾아나선 날, 필자는 고고학 백과사전, 이미 읽고 정리한 요하난의 무덤에 대한 글, 그의 무덤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준비하고 4X4 지프를 타고 기브앗하미브타르 동네로 향하였다. 
 
이미 발굴된지 30여년이지난 옛날 무덤을 쉽게 찾을 수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 동네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요하난 벤하그콜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그런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네의 오래된 작은가게를 찾아가 주인을 통해 그 동네의 토박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고대무덤이 발견된 허름한 집을 알게 되었고 그 허름한 집 주인을 통해서 요하난 벤하그콜의 무덤위치만 확인 할 수 있었다. 
 
요하난 벤하그콜의 무덤은 집 재건축과정에서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의 석관은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그리고 쇠 못이 박힌 요하난 벤하그콜의 뼈는 똑같이 복제된 후, 간단한 장례 절차를 거쳐 영구히 매장 되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쌔...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쌌더라(요19:17-18, 40). 

 


이주섭 목사
현)두루Tentmaker(www.eduru.co.kr/두루투어/두루에듀/두루문화원) 고문
현)조지아 크리스챤 대학교(Georgia Christain University) 역사 지리학과 교수
현)성서지리연구원(Institute of the Biblical Geography) 원장
전)예루살렘 대학 역사학과에서 고대 성읍,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에서 고대 도로를 수학
전)4X4 지프를 이용하여 방문 가능한 모든 성경적인 유적들을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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