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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2-11 10:21:30
사해 <THE DEAD SEA>

수 백 만년 전, 지구의 두 거대한 구조판인 아라비아 구조판과 시나이 구조판의 지각 움직임을 통하여 요단대협곡(Great Rift Valley)이 형성되었다. 두 구조판은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움직여 요단 대협곡이 생성 된 것이다. 요단 대협곡에는 북쪽으로부터 훌라분지, 갈릴리호수, 요단강, 그리고 사해가 포함 되어 있다. 사해 인근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저지대이다. 현재 사해의 물은 급속히 줄어들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태이다. 사해로 유입되는 물의 양은 감소한 반면, 증발 양은 많아 사해는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그래서 사해를 보존하기 위한 이스라엘 정부와 요르단 그리고 국제기구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약 7만년 전에서 14만년 전인 홍적세(Pleistocene epoch) 기간에 요단 대협곡에는 거대한 리산 호수가 생겨났다. 리산 호수는 갈릴리에서 요단강과 사해를 모두 포함하는 크고도 긴호수 였다. 당시 리산 호수의 수면은 지금보다 약 250미터 더 높았다. 1만 4천년에서 1만 2천년전에 북미와 유럽의 거대한 얼음이 줄고 빙하가녹으므로 기후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당시 기후의 변화로 리산호수의 강수량은 크게 줄었고 물은 증발되었다. 그러나 약 1만년전에 강수량은 다시 증가했으며 리산호수의 수면도 상승했다. 이때에 사해가 형성된 것으로학자들은 추정한다. 


 
리산반도와 사해가 형성되기 수백 만 년전, 사해가 있는 요단 대협곡은 아라비아 구조판(Arabian Plate)과 아프리카 구조판(African Plate)이 서로 떨어지므로 홍해가 생겼고 이 두 거대한 구조판의 반대움직임으로 훌라분지, 갈릴리호수, 사해가 생긴 것이다. 시나이 구조판과 아라비아 구조판은 아직도 활동중이다.
아라비아 구조판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시나이 구조판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다. 이 두 거대한 지각의 움직임으로 요단협곡에서 특히 사해지역은 더 낮아지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런 지각운동으로 요단협곡의 동서 양쪽에 위치한 산들은 더 높아지고 헐몬산도 조금씩 상승한다.
 
두 지각의 단층운동은 역사적으로 많은 지진을 일으켰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주전31년에 발생한 지진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당시 지진의 흔적은 쿰란유적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사해는 지구 표면에서 가장 낮은 저지대로 사해의 수면은 2009년 조사에 의하면, 해수면 이하 422미터 보다 더 낮다. 사해의 수면이 점점 더 낮아지는 이유는 사해의 양쪽에 위치한 모압 산지와 유다산지의 상승 그리고 기후의 온난화 현상 때문이다. 현재 사해로 유입되는 강수량은 과거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 들었다. 주변의 강수량은 연간 100mm 이하이며 이곳의 여름온도는 평균 104도 (섭씨40도)에 이른다. 사해 인근의 여름 표면 온도는 이보다 훨씬높다. 
 
비는 몇 개의 골짜기를 통해 사해로 유입되지만 물이 사해에서 빠져나가는 출구는 없다. 그래서 사해의 수면은 유입되는 물의 양에 따라 상승하기도, 줄어들기도 한다. 주변에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나면 사해의 수면은 상승했고 가뭄이 들어 유입되는 물이 적으면 사해의 수면은 줄어 들었다. 그래서 사해의 해안선은 수시로 달라졌다. 사해로 유입되는 주 수원은 상부 요단강이다. 상부 요단강은 레바논과 헐몬산의 몇 개의 샘에서 시작되어 강을 이루고 갈릴리 호수를 거쳐 하부요단강을 따라 사해로 유입된다. 지질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사해 해안선이 바뀐것을 과거에 형성된 토사층과 지형에 기초하여 확인한다. 
 
대영제국시절 마크트웨인이 팔레스틴을 방문하여 남긴 기록에 근거하여, 19세기와 현재의 사해를 비교할 수있다. 14세기에서 19세기는 유럽의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 불린다. 그때에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당시 사해수면은 매우 낮았다. 그리고 그 이전 십자군 시대인 11세기 중반에서 13세기 까지는매우 온화한 기후를 형성했는데, 당시 사해수면은 크게 상승하였다. 더 이전에 사해는 큰위기를 맞았던때도있었다. 그리고 비잔틴시대(4-6세기), 헬라와 로마시대(주전1세기- 주후1세기), 금석병용기 말에서 중기 가나안시대(3450-1550 BC) 그리고 신석기 초기(8500-5500 BC)에 사해의 수면은 매우 높았다. 
 
사해의 해수면의 변화에 따라 사해 주변에 정착한 고대 주민들의 생활도 변하였다. 사해의 동쪽 모압산지의 헤스본은 사해의 수면이 상승했을 때는 정착 인구가 많았던 반면, 사해의 수면이 낮아지면, 인구도 크게 줄었다. 그 이유는 수면이 줄어 사해 가까이 접근이 가능했고 마을을 이룰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시대 (철기시대로써1200-586 BC) 는 이런 변화와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시대 특히 주전8-7세기, 사해 인접한 곳에서 고고학유적들이 여럿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적지들은 모압산지로부터의 공격을위한 방어와 사해의 자원을 이용할 목적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Mezad Mazal, Mezad Goza, Qumran, En Gedi)가 있다. 그리고 이 유적들은 헬라시대 말과 하스모니안 시대인 주전 3세기에서 1세기에 다시 재건되어 사용되었다. 이곳은 전략적인면과 자원을 활용하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바라본, 사해의 북쪽 끝지점)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들은 사해의 서쪽해안선을 따라 하스모니안 시대부터 헤롯시대에 걸쳐 형성되었다(141-70 BC). 마사다에서 발견된 나무의 탄소 연대측정에 따르면, 당시는 지금보다 습한 기후를 형성했으며 여리고, 쿰란, 마사다와 Ein Feshkah, Turabeh, Ein Gedi, En Bokek, En Tamar는 주후 1세기 수원지를 끼고 있었으며 크게 번성했었다. 
 
샘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와 물을 저수하는 정교한 저수조 그리고 일년에 몇 차례 내리는 물을 저수하기 위한 댐도 만들어졌다. 이곳은 유대국가의 동쪽경계를 이 루었다. 그래서 이같은 수로시설들은 방어를 목적으로한 정착지의 주민들과 향유(Balsam)와 종려나무를 재배하기 위한 경제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인보켁(En Bokek)의 남쪽은 유다와 나바티안의 경계지역으로, 나바티안들은 원거리 대상인들로서 향유와 향료를 독점 취급하였다. 나바티안들은 사해 인근에서 생산되는 귀중한 향료와 향유를 페트라, 아라비아또는 네게브를 가로질러 가사(Gaza)를 거쳐 이집트 또는 북쪽 메소포타미아, 유럽, 아시아로 무역하였다. 사해의 인근지역은 종려나무가 특히 잘 재배되었다. 신명기 34:3절에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으로 기록되었다. 종려나무에서 열매, 꿀같은시럽, 쥬스가 생산되었다. 
 
또한 사해에서는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하여, 또 음식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한 소금이 무한정 생산되었다. 히브리 성경에는 사해가 소금바다로 기록되었다(Yam ha-Melach) (창14:3, 신3:17, 수3:16). 사해의 소금함유는 30%가 넘는데 이는 지구상의 그 어느 바다보다 소금함량이 높은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미생물이 사해에서는 죽지 않는다. 일부미생물(microorganisms)과 녹조류(green algae) 그리고 붉은 박테리아(red bacteria)는 사해의 높은 소금함유에도 견디어 살아있다. 
 
사해의 북동쪽에는 헤롯이 죽기전 치료를 목적으로 이용하였던 Callirhoe 온천수원지가 있다. 사해의 남쪽에는 Qazone 이 있다. 이곳에는 약 3500개의 무덤들이 즐비한데 거의 대부분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무덤들이다. 인근에 Mazra’a가 있다. 최근 Qazone을 발굴하여 토기종류와 천, 가죽 그리고 천에 싸인 미이라가 발견되었다. 사해의 건조한 기후는 문화적인 유적지가 훼손되지 않고 오래 보존되는 원인이다. 


 
하스모니안과 로마시대에 사해에는 배 선착장이 건설 되었다. 당시 사해수면은 지금보다 약 25미터 높았다. 선착장은 사해의 서쪽 Khirbet Mazin에 있었다. 선착장에서 사람들은 배를 이용하여 사해의 동쪽인 Callirhoe의 온천으로 가는데 이용되었다. 선착장은 북쪽에는 Rujm el Mahr와 남서쪽에는 엔게디와 마사다 인근에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선착장 가운데 하나는 배를 보호하고 사해의 강한 소금으로부터 배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도 갖추었다. 현대에는 강한 염분에 배가 부식되는것을 막기 위해 특수재료를 사용하지만 당시는 나무와 쇠로 배를 만들었으되 부식을 막기 위하여 물로 배를 세척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사해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해는 히브리어로 ‘소금바다’ 라 부른다. 라틴어로는 루카스 아스팔티티스(Lacus Asphaltitis)로 불렸는데 이것은 아스팔트 또는 역청호수 라는 말이다. 고대에 역청은 배를 건조하는 방수목적과 치료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해에서 생산되는 역청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이라를 만드는 방부목적으로도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사해를 역청과 관련하여 생각했던 것은 당시 사해에는 역청이 물위에 떠다닐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다. 1950년대에도 사해에는 어른보다 큰 역청이 물에 떠다녔고 무게는 1톤이 넘는 것도 있었다. 사해에 역청이 많이 생산되는 이유는 지각의 움직임으로 역청이 지표면으로 분출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청을 찾아 볼 수 없는 이유는 지각의 움직임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사해 많은 곳에서 역청이 물에 떠다니며 그 모양과 크기는 마치 목베임을 당한 거대한 황소와 유사하다’ 고 기록하였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창세기 14:10절 에는 ‘사해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다’ 고 기록 되었다. 역청에 해당되는 헤마르는 아스팔트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이다. 이것은 사해 밑 또는 인근에 거대한 유전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 이기도 하다. 나할헤마르(Nahal Hemar)는 역청 골짜기라는 말인데, 실제 사해 남서쪽 역청 골짜기를 방문하면 석회암 지층에 역청이 띠를 두르고 있는 것 을 볼 수 있다.  또한 한 여름철에는 검은 역청 기름이 뜨거운 햇볕에 녹아 흐르는 것 도 확인 할 수 있다. 사해에는 약 80억에서 100억 배럴의 기름이 매장 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여러 차례 유전을 조사한 결과 사해의 기름은 상업적 가치가 없는 기름으로 결론을 내렸다. 지구상의 거대한 유전지대는 교묘하게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피하여 중동지역에 집중적으로 발달되었다. 
 
사해의 동쪽은 사암과 기타 다른암석이 발달되었고, 사해의 서쪽은 주로 석회암이 발달되어 이곳에는 천연 동굴들이 발달 되었다. 대부분의 동굴들은 오랜기간 용해되면서 형성된 동굴로써 공룡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에 이런 동굴들은 피난처로 이용 되었다. 다윗은사울을 피하여 엔게디 동굴로 피신하였다 (삼상24:1-3). 1차 유대인 항쟁(66-73 AD)과 2차 유대인 항쟁(132-135 AD) 때에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저항하여 유다광야의 이런 동굴에 피신하였다. 쿰란일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 역시 이런동굴에 숨겨졌던 것들이다. 
 
사해의 동쪽에서 가장 유명한 동굴은 사피(Safi) 마을 위에 있는 롯의 동굴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는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유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사해의 남서쪽 이스라엘 지역에는 소금산이 있다. 또한 아무 연장없이 손으로 쉽게 파지는 연한 석회질로 이루어진 지역도 있다. 쿰란 일대가 대표적인 곳으로 이곳은 진흙이 침전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곳은 쿰란일대이다. 세례요한은 이곳 유다광야에 거하였고 광야로 나오는 백성들에게 천국의 메시지를 증거하였으며, 샘이 있는 곳에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다. 
 
사해의 동쪽 모압 산지와 서쪽 유다산지는 고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동쪽산지는 서쪽보다 훨씬 높다. 유다산지는 사해인근까지 약 300-500미터 절벽을 이루지만 그러나 동쪽산지는 900미터 이상의 급경사를 이룬다. 사해의 남쪽 아라바 광야의 동쪽에 위치한 에돔 산지와 서쪽 이스라엘쪽에 위치한 네게브 산지는 1500미터 이상된다. 
 
사해의 수면이 지금보다 높았을 때에 동쪽 해안은 가파른 산이 사해의 물과 직접 맞닿아 통행이 불가능 하였다. 반면 서쪽 해안은 유다 산지의 높은 곳에서 깊은 골짜기를 따라 물이 사해로 흐르면서 토사가 운반되어 작은 평지를 이룬 곳들이 있다. 사해의 수면이 낮아진 이후 서쪽은 물론이고 동쪽도 사해 해안을 따라 통행이 가능해졌다. 
 
현재 사해의 수면은 해수면 422미터 더 낮다. 수면은 해마다 1미터 정도씩 낮아진다. 사해의 깊이는 북쪽이 남쪽에 비하여 훨씬 깊다. 수면으로부터 깊이는 300미터에 이른다. 그러나 남쪽은 현저히 낮아 사해 바닥이 드러나 현재 사해는 둘로 나뉘어 졌다. 10년전에는 요르단 지역 사해 해안을 따라 도로가 없었다. 또한 쿰란 근처의 에인 페쉬카(Ein Feshka) 남쪽역시 사해의 물이 25미터 상승하면 모두 잠긴다. 지난 50년간 사해는 25미터 이상 물이 감소하였다. 


 

이주섭 목사
현)두루Tentmaker(www.eduru.co.kr/두루투어/두루에듀/두루문화원) 고문
현)조지아 크리스챤 대학교(Georgia Christain University) 역사 지리학과 교수
현)성서지리연구원(Institute of the Biblical Geography) 원장
전)예루살렘 대학 역사학과에서 고대 성읍,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에서 고대 도로를 수학
전)4X4 지프를 이용하여 방문 가능한 모든 성경적인 유적들을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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